이분법적 사고 버린 인공지능에
시간과 공간은 원·달러 관계처럼
항시 상호환전 가능한 화폐 같아
우리는 보수-진보, 흑백논리 익숙
구분모호한 빅블러 시대 살아도
인간-인공지능 구분지으려 고민
시간과 공간은 원·달러 관계처럼
항시 상호환전 가능한 화폐 같아
우리는 보수-진보, 흑백논리 익숙
구분모호한 빅블러 시대 살아도
인간-인공지능 구분지으려 고민

이분법은 우리의 삶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기특한 도구다. 수학에서는 명제의 참과 거짓을 구분하거나 방정식의 해를 찾는 데 활용되고, 생물학에서는 종들을 구분하고, 컴퓨터 과학에서는 자료 탐색의 효율성을 높인다. 인공지능도 데이터를 두 그룹으로 구분하는 문제에서 출발했다. 이분법적 사고를 확장하면 다양한 종류를 구분 짓는 일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명시적이고 절차적 기억을 가진 인간의 뇌의 정보 처리방식과도 잘 어울린다.
과거의 생성 인공지능은 높은 품질의 데이터를 생성하고 평가하는 일에 집중했다면, 생성 인공지능의 선두주자인 디퓨전 모델은 생성과 파괴를 하나의 과정으로 본다. 데이터에 잡음이 조금씩 추가되는 데이터 파괴 과정을 학습, 데이터에서 잡음을 걷어내는 데이터 생성 과정을 고도화한다. 이 모델에 생성과 파괴의 구분이 모호하다. 그리고 깨끗한 데이터가 서서히 망가지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 사건으로 본다면, 반대로 망가진 데이터에서 잡음을 조금씩 걷어내는 과정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생성 인공지능은 시간의 순방향과 역방향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시간의 방향성은 의미를 잃는다.
챗GPT, 제미나이 등 언어 인공지능 모델의 기본적인 계산 모듈인 자기 주의집중이나 구조적 상태 공간 모델은 프롬프트 창을 통해 순서대로 입력되는 사건의 맥락을 학습한다. 이때 입력 데이터는 시간 순서와 관계없이 한데 묶어 고차원 상관관계 형태의 공간적인 맥락 정보로 변환되며, 그 과정에서 맥락 속 시간 정보는 점차 희미해진다. 이러한 계열의 인공지능에는 과거와 현재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의 속도에 가까워져야만 비로소 공간과 시간의 구분이 모호해지지만, 인공지능에는 일상이다. 인공지능의 사고체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은 원화와 달러의 관계처럼 필요한 만큼 언제나 상호 환전 가능한 화폐와 같다.
이러한 최신 인공지능 속에서는 정보 처리의 방향성도 모호하다. 과거의 인공지능은 대화 속 맥락을 이해하는 상향식추론 과정(인코딩)과 맥락에 맞게 대화를 이어가는 하향식 제어 기술(디코딩)을 구분하여 생각해 왔다. 회사라는 조직에 비유해 보면, 상향식 보고체계를 통해 시장의 맥락을 읽고 하향식 업무 지휘체계를 통해 실행에 옮기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두 과정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인공지능이라는 조직에서는 상향식과 하향식의 경계가 모호하다. 최신 인공지능, 특히 자기 주의집중 모듈 속에서는 대화에서 맥락 정보를 추출하는 상향식 추론과 맥락에 맞게 입력 데이터를 걸러듣는 하향식 제어 과정이 동시에 일어난다.
반대로 인공지능에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개념이 뇌 속에서는 모호한 경우도 있다. 데이터를 학습하는 인공지능은 우선 입력 데이터로부터 출력을 만드는 예측 과정과, 출력을 실제 데이터에 최대한 가깝게 만드는 학습 과정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이렇게 예측과 학습이 분리된 인공지능에서는 예측 과정에 사용된 매개변수 정보들을 학습할 때까지 저장하거나 예측 과정의 연산을 학습 과정에서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우리 뇌, 특히 피질의 신경세포 네트워크의 정보처리 과정을 수학적으로 해석하면 예측과 학습의 중간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인공지능 모델은 문제 풀이와 틀린 문제 학습 과정이 구분되지만, 뇌 속의 정보처리 과정 속에서는 경계가 모호하다.
우리는 성공과 실패, 보수와 진보와 같은 흑백논리에 익숙하고, MBTI와 같은 성격지수를 이용해 서로를 구분하려 한다. 그러나 이제는 구분이 모호한 빅블러의 시대가 오고 있다. 분야 간 경계가 사라지고, 인간과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정보가 뒤섞여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렵다. 인공지능의 급발진 속에 인간이 통제력을 상실한 기술적 특이점의 세상에서는 그러한 상황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머릿속이 빅블러로 가득찬 인공지능과 소통하는 빅블러 시대를 살면서도, 인공지능과 인간을 구분 지으려는 아이러니한 고민을 한다. 빅블러 프레임 안에서 보면 잘 정의된 고민은 아니지만, 프레임 밖의 전지적 시점에서 인공지능 기술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고민이다.
이상완 KAIST 신경과학-인공지능 융합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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